법정에서도 AI 균형을 찾는 판사와 변호사들, 그 파장은 어디까지인가
법원이라는 공간은 수백 년 동안 ‘사람의 판단’을 신성시해온 곳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 연방법원과 주법원 전반에서 AI 활용 기준을 둘러싼 논쟁이 전선을 넓히고 있다. 이 문제가 단순한 기술 도입 논쟁이 아닌 이유는, 법원의 결론이 금융 시장·보험·리걸테크 산업 전체의 규칙을 재편하기 때문이다.
1. 왜 지금 법정이 AI의 최전선이 됐는가

2023년 챗GPT가 촉발한 ‘허위 판례 인용’ 사건이 기폭제였다. 뉴욕 남부지방법원에서 변호사가 GPT가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그대로 제출해 법원의 경고와 제재를 받은 사건은 전 세계 법조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이후 각 법원은 저마다 다른 AI 사용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고, 2026년 현재 미국 연방법원 94개 지방법원 중 절반 이상이 서로 다른 내용의 AI 공시 규정을 운영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책임 소재의 불명확성’이다. AI가 법률 문서를 초안하고, 판례를 요약하고, 심지어 양형 적합성 분석을 보조하는 상황에서, 그 결과물에 오류가 발생했을 때 누가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합의가 없다. 변호사 윤리 규정은 여전히 개인의 전문적 판단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으며, AI는 그 틀 안에서 명확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2. 역사적 비교: 복사기·컴퓨터도 한때 법정의 ‘위험 기술’이었다

새로운 기술이 법 체계와 충돌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0년대 법원이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이메일이 법적 통지 수단으로 인정받은 것도 채 30년이 되지 않았다. 전자서명(E-Sign Act, 2000년)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되기까지 의회와 법원이 함께 기준을 만드는 데 수년이 필요했다. AI는 그 속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이전 사례들과 구별된다. 이메일이나 전자서명은 인간의 판단을 ‘전달’하는 도구였지만, AI는 판단 자체를 ‘생성’한다. 이 차이가 법조계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영국 법원은 2025년부터 AI 보조 법률 문서에 대해 ‘변호사 검토 확인 서명’ 의무를 시범 도입했고, 싱가포르 대법원은 AI 사용 가이드라인을 공개하면서 결과물의 최종 책임은 변호인에게 있음을 명문화했다.
3.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위협받는가

리걸테크 기업들에게는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Harvey AI, Casetext(Thomson Reuters 인수), Lexis+ AI 같은 법률 특화 AI 플랫폼들은 이미 대형 로펌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시장조사기관 Allied Market Research에 따르면 글로벌 리걸테크 시장은 2025년 약 280억 달러에서 2030년 60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이 예상된다. 반면 중소 로펌과 개인 변호사들은 이중 압박에 처해 있다. AI를 도입하지 않으면 업무 효율에서 뒤처지고, 도입하면 규정 위반 위험과 오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법률 소비자 입장에서는 AI 덕분에 법률 서비스 단가가 낮아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AI 결과물이 소송 결과에 영향을 미칠 위험도 함께 커진다. 보험 업계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 대형 법조인 배상책임보험(Legal Malpractice Insurance) 사업자들은 2025년 하반기부터 AI 활용 여부를 보험료 산정 변수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AI 관련 분쟁이 보험 청구로 이어지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두 가지 시나리오로 전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표준화 경로’다. 미국 사법위원회(Judicial Conference)가 연방 차원의 통일된 AI 사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각 주 법원이 이를 준용하는 방향이다. 이 경우 리걸테크 기업들에겐 명확한 시장 규칙이 생기고, 대형 로펌 중심의 AI 도입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개인·중소 법률 시장은 플랫폼화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두 번째는 ‘혼란 지속 경로’다. 연방과 주, 형사와 민사, 나아가 나라별로 규정이 파편화된 채 수년간 충돌이 이어지는 시나리오다. 이 경우 컴플라이언스 비용이 커지고, 규정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대형 플레이어에게 시장 집중이 가속화된다. 개인 법률 서비스 시장은 오히려 위축될 수 있다. 추측을 덧붙이자면, 2026~2027년은 각국 최고법원 판결이 AI 책임 기준을 구체화하는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5. 독자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법률 서비스를 이용하는 일반 소비자라면, 변호사에게 “이 문서에 AI가 사용됐는지, 사용됐다면 어떤 검증 절차를 거쳤는지”를 명시적으로 물어볼 것을 권한다. 계약서나 소장 초안에 AI 생성 문구가 포함된 경우, 판례 인용 부분은 반드시 원문 확인을 요청하라. 리걸테크 관련 투자자라면, 단순히 ‘AI 도입’을 내세우는 기업보다 ‘검증 프로세스’와 ‘책임 구조’를 명확히 설계한 기업을 선별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Harvey AI나 Casetext 같은 선도 기업들이 어떤 감사(audit) 체계를 갖추는지를 비교 지표로 활용하라. 상장 리걸테크 기업의 경우, 규제 공시(regulatory risk disclosure) 항목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작성됐는지가 경영진의 리스크 인식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변호사나 법무 담당자라면, 소속 법원의 AI 공시 요건을 지금 당장 확인하라. 미국 법원은 법원별 홈페이지 ‘Standing Orders’ 섹션에 AI 관련 규정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한국 법원도 2025년부터 전자소송 시스템 내 AI 초안 작성 관련 내부 지침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국내 법조인들도 무관하지 않다. 나는 이렇게 본다 법원의 AI 갈등은 기술과 제도의 속도 차이가 빚어내는 마찰이지만, 그 결론은 결국 ‘책임의 재배분’으로 귀결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도구가 법 체계에 흡수될 때마다, 그 도구를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플레이어가 시장 주도권을 쥐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AI의 경우, ‘능숙하게 다룬다’는 것의 의미가 단순히 기능을 잘 쓰는 것을 넘어 ‘책임 가능한 구조 안에서 쓴다’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규제의 방향이 정해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검증 체계를 갖춘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간극은, 규제가 확정되는 순간 시장가치의 차이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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